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단식 9일기도시작하며
"악법을 제정하고 양민을 괴롭히는 법령을 만드는 자들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이사10,1)
오늘 저희는 역사와 민족, 그리고 하느님 앞에 겸손되이 용서를 청합니다.
제단 앞에 엎드려 사제로 서품되던 시간, 하느님 백성들은 저희들이 사랑과 평화,
자유와 해방을 주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은 사제가 되길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의 첫마음 역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희망을 섬기는 사제, 반목과 불신이 있는 곳에 화해와 용서를 심어주는 사제,
그릇된 세상의 질서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제가 되고자 굳게
다짐하였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그 첫 마음을 간직하지 못했으며, 쇄신을 통해
끊임없이 깨어있는 삶을 살기보다는 일상의 안락함에 안주할 때가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국가보안법은 그 동안 죄 없는 순박한 백성을 옭아매고 감옥에 가두었던
악법입니다. 이 악법은 갈라져 신음하는 동포를 적으로 규정하여 미움과 증오심을
조장하였습니다. 또한 부모 형제를 갈라놓아 서로 불신하게 만들고, 인간의 기본권인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제한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실제로 이 법은
평범한 백성을 남파 간첩으로 만들기도 하였고, 생존권 보장을 외치는 노동자들,
군부독재에 항거하던 학생들, 쿠데타와 인권유린을 비판하는 민주인사들을 탄압하는데
사용되어 왔습니다. 또한 애매한 법조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남용하여 1백만
명이나 되는 힘없는 하느님 백성을 희생시켜 왔습니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요즈음 정치권에서는 독소조항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국가
안보상 폐지는 안되고 일부 조항만 개정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듯 합니다.
하지만 개정안이나 대체입법안은 국가보안법이 반세기 동안 끼쳐온 심대한 해악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대안이 되지 못합니다. 특히 남북 교류 확대로 민족통일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이때에 과거 독재정권의 권력을 비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개정이 아니라 완전 폐지되어야 합니다.
국가보안법의 철폐를 주장하며 서울에서 20여일 동안 단식기도를 하고 있는 동료
사제들의 결연한 의지는 이제 각 교구로 점점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동료 사제들의
용기에서 희망을 보며 인천교구 사제들도 그들의 가난한 외침에 동참할 뿐 아니라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입니다.
지구촌 모든 가족들이 새로운 천년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도
그리스도 강생 2000년 대희년을 선포하였습니다. 이 대희년은 모든 민족과 집단이
지난날의 잘못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청함으로써 얼룩진 과거를 청산하여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하는 기쁨의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이 땅에서의
대희년이 국가보안법의 폐지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 길을 시작합니다.
저희는 시대의 징표를 올바로 파악하고 살아내야 할 사제로서 우리들의 몫인 이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자 합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중대한 결정을 내리거나
하느님의 특별한 도움을 청할 때 9일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에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가난한 이들의 희망과 의지를 담아 오늘부터 9일 단식기도를 시작합니다. 저희의
단식은 이사야 예언자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너희 빛이 새벽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이사 58,5-7). 저희들의 이 단식기도가 억압과 탄식으로 어둠에 쌓인
한반도에 새벽을 가져오는 작은 발걸음이기를 바랍니다.
이 작은 발걸음을 통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정이 모든 이들의
마음에서 되살아나고, 우리와 이웃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다시금 꽃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제로서 부끄럼 없이 세상에
나설 수 있는 새로움의 시작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희들의 이 작은 발걸음에
함께 해 주시기를 겸손되이 청합니다.
국가보안법 50년, 그 동안의 고통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더 이상은 안됩니다.
국가보안법은 철폐되어야 합니다!!!
1999년 9월 28일
단식 9일기도에 들어가는 인천교구 사제 일동
